용서하기
누군가를 용서하는 것은 어려운 일인 것 같다.
나는 뒤끝이 있는 사람이다.
낳아주시고 길러주시고 아낌없는 사랑을 퍼부어주시는 나의 부모님이 나를 보고 말씀하시기를,
"너는 성격이 지랄같다. 그 성격만 고치면 좋은텐데."라고 말씀하실 정도다.
나는 내성적이고 고집이 세고 뒤끝이 있다.
그래서 용서하는 것 그 자체가 힘들다.
용서는 가해자만 좋은 일이 아니라 피해자에게도 정서적으로 유익하다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다.
그래도 내가 피해자가 되면 가해자를 용서하기란 힘이 드는 법인가보다.
몇 년전 나에게 사건이 일어났고,
나는 마음에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하지만 어이없게도 나를 아프게 한 사람은... 그 가해자는 나를 겨낭하고 벌인 일이 아니었다.
속담 중에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라는 말이 있다.
그 경우처럼 내가 새우의 처지가 된 것이었다.
고래는 새우에게 피해를 줄 의도는 없었다.
다만 자기 일을 했을 뿐이었다.
고래는 나쁜 일을 계획하고 있었고 실행을 감행했고 그러다 중간에 마음을 바꿔 옳은 길로 되돌아갔다.
상황만 봐서는 아름다운 해피엔딩이다.
고래가 나쁜 일을 계획했지만 실제로는 중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새우는 피해를 입었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격이다.
고래는 살짝 긁힌 정도의 상처를 입고 몇 일만에 곧바로 회복되었지만,
새우는 큰 부상을 입었고 흉터를 남기며 몇 년째 회복 중인 셈이다.
새우는 고래 옆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그 일의 흐름에 끼어있었다는, 하필 그때 거기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피해를 당하게 되었다.
새우가 마음속에 부상이라고 표현할 만한 타격을 입었는데,
그렇다면 고래가 아무잘못이 없다고 말할 수 없지 않은가.
비록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누군가가 그로인해 큰 피해를 받았는데,
고래가 잘못한 게 맞잖아.
나는 상처를 받았는데, 왜 고래가 책임이 없는 건데.
왜 고래는 저렇게 잘 먹고 잘사는 건데. 왜 형통하게 잘사는 건데.
나는 그일로 인해 이렇게 힘들어 하고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왜 고래는....
왜 고래가...
나는 고래가 미웠다.
고래를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를 하지만 그렇게 되어지지가 않았다.
뜬금없을 수 있겠지만, 그때 다가온 성경구절이 요나서 4장이다.
위안을 받았다.
* 요나서 4장 *
1.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2.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3.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
4.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시니라
5. 요나가 성읍에서 나가서 그 성읍 동쪽에 앉아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그 그늘 아래에 앉았더라
6.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사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
7. 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시매 시드니라
8.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쪼이매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니라
9.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하니라
10.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11.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하나님이 요나에게 말씀하신다.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그러자 요나가 대답한다.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요나는 하나님을 비꼬면서 이렇게도 말한다.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언뜻 좋은 말처럼 귓가에는 들리지만 사실은 약속을 지키지 않으시는 한입으로 두말하시는 하나님을 향해 요나가 비꼬는 말이다.
성경책을 보면 알수 있겠지만, 요나는 하나님에게 화를 내고 있다.
나 역시도 그랬던 거다.
나는 고래가 아니라 하나님한테 화가 났던 거다.
처음에는 고래에 대한 화였지만 결국에는 하나님께 화가 났던 것이다.
고래에게는 기대 자체가 없으니 실망도 없다.
하지만 하나님한테는 실망했던 것 같다.
고래가 나쁜 일을 계획할 때, 하나님은 나에게 고래를 저주하는 예언의 느낌을 주셨다.
다행히 고래는 마음을 바꿔 옳은 길로 되돌아갔다. 그래서 저주는 실행되지 않았다.
그리고 고래는 저렇게 잘먹고 잘살고 성공하고 형통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나는....나는..
고래의 형통한 삶과 나의 삶이 비교가 되었다. 나는 왜 이렇게나 형편없이 살고 있지??? 이렇게나...왜...
공평하지 못하잖아...
공평하지 못하잖아..
억울하다.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누가 복음 15장 11절~32절의 "돌아온 탕자"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유산을 탕진하고 거지가 되어 돌아왔다.
아버지는 잃어버린 아들을 찾았다며 기뻐하며 잔치를 베풀었다.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집에 돌아와 아버지에게 화를 낸다.
여러해동안 아버지를 섬긴 나에게는 염소새끼를 주어 즐기게도 한적도 없으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둘째 아들에게는 잔치를 열어 줄수 있습니까.
맏아들의 심정. 그 배신감.
공평하지 못하잖아.
나는 돌아온 탕자의 맏아들의 심정과 요나의 심정에 깊이 공감했다.
그렇다. 사건이 있고난 후에 나는 복잡한 감정을 지닌 찌질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이 죄로 인해 댓가를 치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 것에 공감했다.
요나 입장에서는 억울하지 않겠는가.
요나는 가만히 있는데 하나님이 니느웨 사람들의 죄악으로 인해 재앙을 내리겠다고 선포하라고 명령하시지 않으셨던가.
하나님이 말씀하신 부분이 아니던가.
그런데 왜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지 않으시는가.
요나는 물고기 뱃 속에 갇히고 우여곡절 끝에 겨우 용기를 내서
니느웨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메시지를 재앙을 선포했는데,
어라, 아무일도 없네.
어라..잠잠하네...
그럼 그동안 나의 수고와 나의 고생은 뭐람..
물론 모든 상황은 해피엔딩이지만, 요나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공평하게 처신하지 않다고 원망할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요나가 찌질하다는 것은 나도 안다.
하지만 찌질해도 지금 화가 너무 나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이다.
얼마나 억울했으면 요나는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라고 소리쳤을까.
내가 파멸할지라도 내 주장이 옳다고 소리치고 있다.
요나는 하나님한테 대놓고 화는 못내고,
분노의 화살을 하나님에게 향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자기 자신을 향해 겨눴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녀인 자기를 향해 분노의 화살을 겨눈 것이다.
그게 하나님께 하는 복수이고 분노의 표현인 것이다.
참으로 어리석은 복수인 것이다. 자멸이라니...
그런데, 나도 그런 심정을 느꼈다.
공평하지 못하다는 나의 울분에 찬 원망의 소리에 하나님은 성경구절을 주셨다.
누가복음 15장 31절~32절 :
돌아온 탕자에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요나서 4장 10절~11절 :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한 자가 십이만여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어떻든 저떻든,,
결론은 하나님은 고래를 용서하셨고,
하나님이 고래를 용서하시겠다는 데...
내가 왜 화를 내는가.
하나님은 나도 아끼시지만, 고래도 아끼시니까..
하긴, 고래가 잘못을 뉘우치고 고래가 평생동안 선한 일도 그동안 많이 했으니까.
물론 고래는 나에게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를 구하지는 않았다.
왜냐..고래는 나한테 잘못했는지도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마어마한 크기의 고래의 눈에 쬐그만한 새우 나부랭이가 눈에 띄지 않았을 것이다.
새우가 보이지도 않는데 새우 등이 터졌는지 어찌 알겠는가.
무심코 연못에 던진 돌맹이에 개구리가 맞아죽는다고 해도, 돌맹이를 던진 사람은 그 사실조차도 모르지.
그러니 내가 억울해 했던 거지.
그러니 내가 하나님한테 화를 냈던 거다.
그런데 어쩌겠는가.
내가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기에 고래를 사랑하기에 그 죄를 용서하시고
그래서 그들에게 형통함을 주신다는 것을...
나도 자주 죄를 짓고 자주 회개하고 자주 용서를 받지 않았던가..
나도 삶 속에서 용서를 많이 받았으면서,
나만 용서해주시고 고래는 용서하지 말라고 할 수 있는 노릇도 아니지 않은가.
내가 사랑하는 하나님이,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어찌하겠는가.
무서운 아버지보다 자애로운 아버지가 있는 것이 좋지 않던가.
사소한 일에도 엄격하게 심판으로 매번 회초리로 때리는 하나님 아버지보다,
사랑이 넘침으로 오래참으시고, 잘못할 때마다 매번 용서해주시는 하나님 아버지가 더 좋지 않던가.
그런 인자한 아버지를 옆에 두고 싶지 않던가.
내가 어쩔수 없지...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시니,
하나님이 그들의 회개기도를 들으셨으니,
하나님이 그들을 용서하기시로 결정하셨으니,
내가 뭐라고...욱하며 성내겠는가.
욱을 가라앉히자.
화를 가라앉히자.
하나님의 뜻을 알았으니 "이제 그만 됐다"
잊어라. 잊어버려라.
용서하라.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오늘날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
몇 년이 지났고 하나님은 고래에게 벌을 내리셨다.
하나님은 고래의 죄를 묵인하지 않으시고 합당한 벌로 심판하셨다.
다만, 내가 원했던 시기(죄를 짓자마자 곧바로 즉시)가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그 시기 그 때에 벌을 내리셨다.
고래의 잘못에 대해 왜 처벌하지 않냐고 분노하던 과거의 나의 어리석음이야.
몇 년이 지났기에 나의 분노는 무덤덤해졌고 고래가 벌 받는 것도 딱히 통쾌하지도 않았다.
다만 하나님은 공의롭다 그 섭리를 다시금 느꼈다.